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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닉네임관리자 작성일2015-06-08 조회수8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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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boardView22
구례(求禮/GooRye)는 전주의 동쪽 지역인 진안군의 팔공산에서 시작해 남-북 방향으로 내륙을 관통해 남해로 흘러나가는 섬진강(蟾津江)의 시작점이다. 이곳은 섬진강 상류천이 병방산(丙方山, 160 m)을 감아 돌아 지나면서 남쪽의 순천의 황전천(黃田川)과 합류되어 비로서 ‘잔잔한 모래 물’이 되고, 오산(鰲山, 541 m) 앞에서는 북쪽의 서시천과 합류되어 결국 S형으로 방향을 바꾸는 매우 드라마틱한 분지이다.
 
 

 

구례

 

 

모래내와 잔수진

 

구례(求禮/GooRye)는 전주의 동쪽 지역인 진안군의 팔공산에서 시작해 남-북 방향으로 내륙을 관통해 남해로 흘러나가는 섬진강(蟾津江)의 시작점이다. 이곳은 섬진강 상류천이 병방산(丙方山, 160 m)을 감아 돌아 지나면서 남쪽의 순천의 황전천(黃田川)과 합류되어 비로서 ‘잔잔한 모래 물’이 되고, 오산(鰲山, 541 m) 앞에서는 북쪽의 서시천과 합류되어 결국 S형으로 방향을 바꾸는 매우 드라마틱한 분지이다.

 

따라서 구례는 병방산(丙方山) 앞의 포구의 이름을 따라 잔수진(潺水津)으로 불려왔다.  이에 잔수진은 바다 배가 남해로부터 영남과 호남을 나누는 섬진강 계곡을 따라 40 km 거슬러 올라오는 마지막 종점이었다.  실제로 잔수진은 섬진강을 따라 서북쪽 상류로 곡성의 압록진(鴨綠津, 현재 섬진강으로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교 지점)과 남원의 순자진(?子津, 현재 섬진강으로 요천이 합류하는 금곡교 지점), 그리고 섬진강 건너편 남동쪽의 문강진(文江津, 현재 문척 나루터)을 지나 하류의 하동과 광양의 ‘두꺼비 마을’을 뜻하는 섬진(蟾津) 마을까지 연결됐다.

 

구례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지리산(智異山) 노고단(老姑壇, 1,507 m)으로부터 시작되는 한반도 내륙의 남쪽 관문이었다.  또한 구례는 역사 속에서 호남과 영남, 그리고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에 따라 구례의 동쪽 8 km에 위치한 토지면(土旨面) 송정리(松亭里)의 석주관성(石柱關城)은 내륙의 입구이며, 마한과 진한, 그리고 백제와 신라의 경계였다.  석주관성은 섬진강을 길게 보여주는 경관점으로, 고려 때 처음 조성되었고 1592년 대규모로 개축되었다.  석주관성은 고려 말기부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 남해로부터 올라오는 왜구 침입의 방어 거점이었다.

 

 

봉성산

 

구례는 서쪽의 봉성산(鳳城山, 364 m)을 주산으로, 멀리 동쪽으로는 지리산을 두고 그 서쪽 사면을 따라 북쪽 산동면에서 시작해서 남동 방향으로 흐르는 서시천(西施川)에 형성되었다.   이곳의 변성암 지대의 오랜 침식으로 서시천을 따라 형성된 긴 타원형의 비옥한 퇴적지로서 그 형태는 “봉황이 알을 품은 모습”을 갖고 있다고 비유되어 ‘봉성(鳳城)’으로 불려왔으며, 그 길이는 약 8 km이며 폭은 약 4 km이다. 구례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진정한 영남과 호남 사이의 산수향”이라고 불려왔으며, 택리지에는 “비록 들은 좁지만 농산물의 수확은 많고, 물이 마르지 않으며, 가뭄 타는 일이 적은 곳”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구례는 섬진강의 이동경로를 제외한 육상 접근이 제한되어 왔던 좁은 선형의 분지로서, 도시 확장을 위한 공간이 제한되어온 곳이기도 하다.  넓은 농지의 확보가 불가능한 입지조건은 자치행정을 확보하기 위한 인구 확보를 불가능하게 했다.  실제로 구례는 서시천을 따라 광의면에서부터 넓은 들이 나타나지만 곧 섬진강으로 종료되고 만다.  따라서 구례는 주변의 곡성(통일신라), 남원(고려와 조선), 순천(조선)에 속했던 지방행정의 경계지 였다.  

 

 

병방마을

 

구례의 초기 주거지 형성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현재 구례 교의 동북쪽으로 병마산(丙馬山, 160 m, 1861년에 병방산(丙方山)으로 개명)의 동북쪽에 원천을 두고 형성된 동리(東籬)가 그 사례이다.  이 동쪽 울은 신라의 김맥종(金麥宗)이 545년(진흥왕 6) 섬진강을 앞에 두고 조성한 마을로 현재의 원방리이다.  이후 동리는 1371년(공민왕 20)을 전후로 70여 호의 마을로 성장했으나, 화재 후 병마산 남쪽의 현재 병방리로 이전되어 병방(丙方) 마을로 재조성되었다.  

 

구례는 한반도 내륙에서 섬진강을 따라 남해안으로 향하는 이동 동선과 물산 해운의 거점이었다.  구례의 잔수역(潺水驛)은 고려 시대 996년(성종 15)을 전후로 원방리 병마산(병방산) 남쪽에 현재 구례읍 신월리 구례학생의꿈동산/(구)구례남초교에 조성되어 기능했던 역참(驛站)이었다.  잔수역은 개성과 서울로부터 전주와 남원을 지나 광양과 하동, 그리고 순천과 여수으로 연결되는 육상의 역로였으며, 1392년(태조 1)을 전후로 구례교 옆 신월리 신월 치안센터 주변에 입지했던 섬진강의 포구인 잔수진(潺水津)과 함께 기능한 대규모 역참이었으며 1861년에 폐쇄되었다.

 

 

화엄사와 장죽전

 

구례가 한반도의 지역거점으로서 성장하도록 유도한 요소는 무엇보다 화엄사(華嚴寺)이다.  구례와 화엄사와의 관계는 1872년 제작된 구례현지도와 1918년 제작된 지도에서도 쉽게 관찰된다.  조선의 구례성(1479)은 동문을 통해 서시천을 건너 냉천을 따라 조성된 길(현재 국도18)을 통해서 화엄사 계곡으로 연결되었다.  구례는 현재 남원-곡성-광양-순천을 연결하는 국도 17로부터 냉천 교차로를 통해 화엄사로 연결되고 있다.

 

화엄사(華嚴寺)의 조성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인도의 승려로서 황룡사(皇龍寺)에서 수도한 연기(煙氣, ?-?) 조사(祖師)에 의해 755년(경덕왕 14)을 전후로 조성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는 신라 화엄사상(華嚴思想/Huáyán Lùn)의 기본서로서 754년(경덕왕 13) ‘화엄경(華嚴經)’의 사본이 완성된 시기이다. 

 

신라의 화엄사상은 의상(義湘, 625-702)을 통해 670년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로 전파되어 ‘해동화엄종’으로 성장했다.  즉 화엄사는 신라의 ‘화엄사상’의 전파를 위해서 지리산 노고단의 남서쪽 계곡에 처음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과 해회당(海會堂)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불교사찰이다.  이후 화엄사는 통일신라 때에 “8원 81암자의 화엄불국 연화장 세계”에 “3,000 명의 스님들이 화엄사상을 연구”했다고 전해질만큼 번성하였다.

 

신라의 심상(審祥, ?-742)은 일본의 나라에 조성된 다이안지(大安寺, 717년 나라로 이전) 사찰에서 백제의 후손이자 일본의 승려 양변(良辨)의 요청으로 화엄경을 강술하며 일본의 화엄종인 케곤(Kegon 華?宗)의 시작하였다.  이후 중국 당조의 승려인 도선(道璿, 702-760)이 7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화엄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일본 화엄종의 거점은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728) 사찰이다.

 

화엄사의 입구에 입지한 ‘구례장죽전녹차시배지(求禮長竹田綠茶始培址)’가 하동의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의 장죽전과 함께 한반도 최초의 녹차 시배지로 여겨진다.  이곳은 연기 조사가 화엄사를 조성하면서 인도에서 가져온 차 씨앗을 화엄사 장죽전에서 재배했고, 이후 본격적인 차 재배는 통일신라의 김대렴(金大廉)이 828년(흥덕왕 3) 조공 사신으로 당조의 문종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차의 씨를 가지고 와서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화엄사의 장죽전은 화엄사 밑의 소나무 숲과 대나무밭 사이에 ‘진대 밥’이라 불리는 면적 27,000 m2(8,200 평)의 차 나무 밭 인근으로 추정된다. 

 

 

서시천변의 구례장

 

구례장의 기원에 관해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구례장은 1780-1790년대 전후로 5일장(3·8일)으로 정기시장으로) 구례성 동문 밖 서시천 변에 봉동리 장터가 형성되어 조선 고종때까지 가축시장과 함께 열렸다고 확인된다.  구례장은 상류의 남원장과 연결되어, 곡성, 순천, 하동 지역권의 중심장으로 영남과 호남의 내륙과 남해안의 물산들이 하동포구로부터 섬진강을 통해 매매되고 운송되었다. 

 

구례장은 지리산을 포함한 주변 산지들로부터 재배된 송이, 산나물, 생지황, 당귀, 오미자, 백복령 등의 한약재, 꿀, 목기 물, 그리고 구례의 특산품인 산수유를 매매해 왔으며 특히 3-5월이 대목장이었다.  특히 구례의 전통 술인 죽력고(竹瀝膏)는 푸른 대를 숯불 위에 얹어 뽑아낸 수액을 섞어 빚은 술로서 신경통의 약으로 이용되었다.

 

구례장은 일제강점기에 서시천 장터로부터 현재 구례 경찰서 남쪽 블록(구례읍 봉동리 317번지 주변)으로 이전됐다.  이 시기에 구례장은 구례 읍장(3•8일)으로 불렸으며, 인접한 광의면의 연파장(2•7일), 산동면 외산리의 원촌장(1•6일)과 함께 정기시장으로 기능하였다.  구례장은 광복 후 현재 백제약국 앞의 구례 상설시장 부지로 이전했으며, 다시 1959년부터 현재 서시천변의 봉동리 장터로 이전되어 2005년 새롭게 정비됐다.

 

< 구례 섬진강과 병방산, 잔수진, 병방마을, 2013 >

 

 

< 구례 화엄사 각황전,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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