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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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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2
닉네임관리자 작성일2015-12-03 조회수17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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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2 boardView22
군산은 1876년부터 한반도에서 시작된 부산, 인천, 원산, 목포, 진남포, 평양의 개항에 이어, 1899년 마산, 성진과 함께 개항도시로 성장하였다. 특히 군산은 청일전쟁(1894)을 전후로 일본인이 한반도로 진입하는 서쪽 관문이 되었다. 군산은 1899년 개항과 함께 ‘군산-오사카 정기선’이 운항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의 자본이 유입되고 호남의 쌀이 집산되어 운송되는 거점항구로 기능했다.
 

군산 2

 


대한제국의 군산항

군산은 1876년부터 한반도에서 시작된 부산, 인천, 원산, 목포, 진남포, 평양의 개항에 이어, 1899년 마산, 성진과 함께 개항도시로 성장하였다.  특히 군산은 청일전쟁(1894)을 전후로 일본인이 한반도로 진입하는 서쪽 관문이 되었다.
군산은 1899년 개항과 함께 ‘군산-오사카 정기선’이 운항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의 자본이 유입되고 호남의 쌀이 집산되어 운송되는 거점항구로 기능했다.

이 시기에 진행된 군산의 변화는 군산항(구항)와 그 배후 주거지의 행태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항 당시의 군산은 금강 변의 구릉들을 중심으로 농촌과 어촌의 마을들이 입지했던 넓은 습지였다.  이후 군산의 개발은 대규모의 습지 간척으로 진행되었고, 군산의 지형은 크게 변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금강 변의 구릉들이 깎였으며, 간척된 습지는 농장으로 경작되었다.

한편 군산항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하천의 모래 퇴적이 심해, 대형선박의 출입이 비효율적인 항구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에 군산항은 선박과 육지를 연결하는 부두시설을 1905년부터 1938년까지 네번에 걸쳐 지속적으로 보완 확장되었다.  한편 항구시설은 그 배후지에 철도가 조성되면서 해상-육상을 직접 연결하는 항구로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산은 무엇보다 금강과 만경강의  옥구반도와 호남평야의 역사적인 거점 항구였던 강경으로부터 그 주도권을 획득하였다.


군산의 국제조계지

대한제국은 이전의 개항도시들과 달리 군산항을 보다 주체적으로 운영하는 개항으로 계획하였다.  이에 군산항에는 항구와 연계된 국제 공동조계지의 조성계획을 수립되었고, 군산항의 행정사무를 관할하는 옥구감리서(1899)가 운영되었다.  이와 함께 군산항에는 세관업무와 출입선박의 감독하는 인천해관의 군산지사인 군산해관(1906)이 옛 군산세관 부지에 조성되었고, 경무서, 우체사, 전보사 등도 조성되었다.

조계지(租界地 concession)란 개항된 항구의 배후지에 항구를 입출입하는 외국인의 자유로운 상업 및 주거활동을 허용하는 치외법권의 외국인 구역이다.  조계지 내의 각 나라의 조계구역은 그 영사관을 중심으로 주민행정을 담당하는 거류지회와 행정사무소를 두고 운영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조계지 도시는 샹하이를 들수 있다.  샹하이에는 항구의 동쪽 배후지에 프랑스, 일본, 영국, 미국, 독일 등의 구역(quarter)들이 나누어 조성되었다.

군산에는 1899년부터 금강 변의 항구시설과 함께 그 남쪽의 평지에 국제 조계지(international concession)가 조성되었다.  당시 조계지는 현재 군산의 구도시의 중심부이다.  군산의 조계지는 이후 공식적으로 1914년까지 존재했으며, 그 이후에는 일본의 행정 주도로 조계지 전체가 일본인 중심의 주거지로 개발되고 운영되었다.

이 시기의 군산의 조계지는 서쪽의 월명산과 동쪽의 경포천, 그리고 북쪽의 군산항과 남쪽의 월명로를 그 경계로 정의되었으며, 약 1,000x900 m 규모의 규모로 처음 계획되었다.  조계지 중심부에는 약 50x70 m 크기의 격자블록들이 동-서 방향으로 5개, 남-북으로 5개로 배치되었으며, 현재 ‘구영7길’이 남-북 방향의 중심가로로 조성되었다. 

특히 군산 조계지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월명산, 수덕산, 창성동 언덕을 중심으로 세개의 주거구역들이 형성되었다.  먼저 월명산의 동쪽사면을 중심으로 영화동에는 일본인 거주지, 그리고 창성동 언덕을 중심으로 장미동과 영동의 동령길(동령고개길)부터 영동사거리(우리문고앞 교차로)까지에는 중국화교인 주거지가 자리잡았다. 

일본인 주거지의 상징적 중심부는 월명산-대사산(大師山)의 전망대 부지에 조성된 군산신사(群山神社)였다.  또한 현재 흥천사 부지에는 군산의 포교활동을 했던 하라 모쿠쇼(原?松)가 안국사(安國寺, 1907)를 설립했으며, 이곳에서는 교육과 의료활동도 함께 수용되었다.  안국사의 교육활동은 결국 인접한 현재 군산초교(1945) 부지에 군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1907)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현재 군산해양경찰서 부지에는 군산자혜의원(1921, 현재 군산의료원)이 개원하였다.

 

 

 
군산 조계지도, 1899
출처: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본정통(해망로)과 중앙로

군산항(구항)에는 간척사업과 함께 부두 남쪽으로 수산업 및 농업 조합, 창고 등이 입지했으며, 그 남쪽 배후에는 항구의 진입부이며 행정과 상업기능의 중심가로인 본정통(현재 해망로)이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군산의 본정통에는 대한제국이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조성한 군산세관(1908, 현재 호남관세전시관), 그리고 군산근대역사박물관(2011)의 서쪽으로 일본인의 대부업 거점이었던 일본 나가사키주하치은행(日本第十八銀行群山支店, 1907), 현재 한국은행(1909)의 전신으로 일본상인의 금융거점이었던 조선은행 군산지점(1922) 등이 입지했다.  이 건물들은 최근 군산시가 추진하여 완료한 군산의 근대문화벨트화지역 조성사업(2009-2013)을 통해 근대건축문화유산으로 복원되었으며, 현재 항구의 복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2차사업(2015-2019)이 추진중이다.


전군가도와 군산철도선

도시설계의 관점에서 군산의 흥미로운 특징들 중의 하나는 군산의 도시중심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전군가도(국도26)’이다.  전군가도는
1908년 군산시청(군산부윤)과 군산법원(현 YMCA)이 입지했던 현재 중앙사거리와 내륙의 전주를 연결하는 신작로이며, 그 도시관통구간이 현재 번영로-중앙로이다.  전군가도는 이후 현재까지 군산의 도시성장의 방향과 형태를 결정해온 요소이다.

또한 군산에는 호남선의 분기선으로 익산과 군산을 연결하는 길이 23 km의 군산철도선(1912)이 호남선(1914)과 함께 개통되었다.  이에 따라 군산역(1912)이 현재 군산공설시장의 맞은편 부지에 조성되어, 군산역과 중앙사거리를 연결하는 중앙로가 군산의 가로상권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군산역과 군산구항을 직접 연결하는 군산화물선과 군산화물역이 구항에 조성되었다.  아쉽게도 군산역은 군산의 동-서 도시연계와 동쪽 도시확장을 방해하는 장애물로서 평가되며 2010년 철거되었다. 

당시 조성된 군산의 도로와 철도는 결국 군산구항과 호남평야를 연결하는 운송인프라로 기능했으며, 특히 내륙의 전주와 익산으로 연결된 호남 최대의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당시 군산구항에는 군산선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이 하루 화물열차 150량의 분량이 운송되었다고 전해진다. 

호남의 쌀의 집산지로서 군산이 성장하며, 동쪽의 경포천 주변에는 쌀을 원료로 하는 생산활동과 선박공장이 번성했다.  또한 철도역과 철도변의 중앙동과 경암동에는 정미소와 양조공장, 고무와 신발의 생산공장, 어선을 수리하고 제작하는 선박공장, 창고 등이 경포천의 금강 유입지점까지 길게 입지했다.

 

 

 
군산의 군산역 주변블록(왼쪽부터 중앙로, 구시장로, 군산역전시장, 오른쪽의 군산화물선, 그리고 멀리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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